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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또 다른 세계

낯선 경험, 시절과 기분

낯선 경험이었다 퀴어소설 그리고 김봉곤
바다에 어른거리는 반짝이는 잔물결 햇살 그의 글을 접하고 느끼는 직관적인 감각이다
경계는 느껴지지 않고 형체도 규정지어진게 없는 윤슬처럼 비춰졌다가 잠시 보이지 않는

앎은 어떻게 전체를 만드는데에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하며 그 속에서 무엇이 만들어 지는지에 있다 (매릴린 스트래선)

새로운 사랑과 용기를 보는 길
이 이야기에 시선의 색을 벗고 알맹이를 열어 드러내야 규범의 거부감이 희미해지고

기꺼이 열려놓은 그의 시절 그리고 그의 기분이 글을 타고 비춰지는 그의 풍경으로 열린다
징검다리를 만드는 건 내 몫이다 (어떤 것이든 내 몫의 할당량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페이지를 넘기며 읽히는 문자들은
무늬를 구별하지 않고 어떤 답도 찾지 않으며 나의 농도를 찾아가는 진동의 흔들림이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만난 낯선 경험이다

 

검정치마의 Everything
비 오는 날 방안에 누워서 서로를 마주 볼 뿐 심지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고 생각난다는 검정치마의 음악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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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풍경을 보면 치열했고 해준을 보면 나른해지는 그런 주말 오후였다 9

기만의 달콤함과 배덕의 재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과 연락을 끊었고 고맙게도 시간과 거리가 나를 대신해 끊어주기도 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기 싫었고 화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없어지는 쪽을 택했다 내가 선명해지는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주 근사했다 41

책장을 넘기는 혜인을 바라보다 어떤 고백은 아주 길고 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고백은 고백을 기다려온 시간보다 휠씬 더 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44

어른이 되고 또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더는 열없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어른이 된 친구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45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여도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상상만으로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가능세계를 그려보는 일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47

나는 오다 카즈마사의 베스트 앨범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또 한번 내가 될 시간이었고 나의 농도를 회복하기에 음악은 제법 효과적일 것이었다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 진동이 흔들림이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랄뿐이었다 48

 

데이 포 나이트

그건 결론에 가까운 것이었지 답은 아니었고 답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나는 질리지도 않고 반복했다 50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버드나무 꽃씨가 한낮의 빛을 품고 눈처럼 흩날렸다 51

나는 곡해하는 방법으로 오해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한번씩 같은 재료를 다르게 요리하듯 그의 편지를 음미하곤 했다 52

빙빙 돌아가는 대화 불분명한 송수신 방향 느리게 오가는 속도들을 나는 좋아했다 때때로 나는 상냥하고 웃기고 내게 무해할 이 남자로부터 너무 많은 정서적 필요를 채우는 건 아닐까 의심도 했다 53

 

나의 여름 사람에게

오랜 제자를 만난 것처럼 그는 나를 한번 끌어안고 이제 어른이 다 되었네 미소짓는 모습을 그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풍경과 동경이 만들어낸 정경은 아름답기만 하고 그가 이곳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상상속의 그처럼 웃어버렸다 128

매미나 새도 너무 높이까지 올라가면 무서워할까 난데없는 생각이 섞이는 가운데 있는듯 없는듯 저기 다시 있는 구름처럼 다시 있다고 여름 안에서 나 없이 당신에게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기는 게 싫다고 130

 

앤드 게임

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 132

나는 그를 잃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잃지 않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었다고도 생각한다 그는 이제 내가 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까 133
내가 왜 그랬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고 이제는 설명해줄 수가 없다 그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꺼낼 맥락을 만들어낼 수 없다 135

나는 불현듯 깨닫는다 그와 내가 연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지나 점차로 친구라는 사실조차 희미해져갈 것임을 이제는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음을 그에 대한 글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될 그는 소설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만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한다 156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시 비를 그어도 좋겠다 그와 나의 열없고 의미없는 미소 그렇게 끝과 시작은 이토록 이어져 있다고비약해 소설이 될 수 없는 순간만이 진실하며 그렇게 문학이 아닌 삶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157

그는 이제 내가 만든 소설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직 글을 쓸때에야 비로소 열린다는 사실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부당함을 느낀다 지금의 그를 불러내 살을 덧붙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며 그는 그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가 아니고는 나는 그를 축성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소환하기 위해 나를 설득해야 하는 내 거짓말들과 기만이 지겨워 질식할 것만 같다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의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 되찾을 풍경과 열린 시간속의 그의 모습을 나는 꼭 알아야겠다 다시 한번 내 시간속에서 내 시간 속의 그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다 내 부끄러움에 지지 않을 것이다 159

 

마이 리틀 러버

칭찬인지 후려치기인지 175

버스에서 뛰어내려 나무 그림자가 묻어나는 편평한 회색타일을 밟는 순간 포근한 마음이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익명의 공간이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우리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었고서울의 경이는 스케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광화문과 인사동이 지척하는 것 176

학영과 나는 무엇이든 말해도 좋을 사이였지만 정말로 민감한 부분은 절대로 꺼내놓지 않았다 민감한 부분은 우리가 아닌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민감한 것이 아니었고 이내 아니게 되기도 쌨으니까 183

나를 달래기 위한 문장들을 곱씹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패배감에 몸서리치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쓸모없고 하찮은 것이니까 187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획득하는 거라고 결국 나는 내게만 중요할 시간과 혼자서 싸우고 있었고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한심해했고 H에게 여전히 사랑받기위해 나는 더 사랑해야 했고 더 사랑해야 하는데 부당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니의 자부였고 나는 또 다시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어느날은 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럴거라면 다시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나를 원망하고 기특해했다 188

늦은 오후의 빛길게 늘어지는 사람 그림자를 피해 길모퉁이에 서 210

친구하자 다정해 보이는 말의 끔찍함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내게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을 고하는 말이었으니까 223

 

그런 생활

손택이 그랬던가 누가 더 안 좋아하는지를 증명하는 관계가 사랑이라고 295

모든것을 말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저는 부단히 눈치를 보며 아주 교활하고 영리하게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25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앙토냉 아르토다 이 말을 즉각 할 수 있기에
나는 그리 말하나니 당신들은 현재의 내 몸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만개의 분명한 양상들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당신들이 결코 나를 잊을수 없게 할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326

 

해설
눈부신 사랑을 창안하는 대신 사랑위에 겹쳐진 폭력과 상투를 받아들일 줄 알고 충만함에 미달되는 수치와 무기력을 기꺼이 견뎌내게 된 그는 이제 쓸쓸하지만 맑은 기운을 담은채 새로운 풍경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339

아를레트 파르주는 아카이브를 두고 역사가 집필되는 곳이 아니라 사소한 것과 비장한것이 똑같은 일상적 어조로 펼쳐지는 곳
사사롭게 새겨진 인물들의 흔적들은 몰래 숨겨진 씨앗처럼 글쓰기의 불안정한 속성을 뚫고 살아남아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사랑의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357

작가의 말
내가 된 나를 통과한 사람들
내 글이 당신을 통과해 당신의 무언가가 되기를
나의 한 시절이 이글을 읽는 당신의 기분이 되고 그 기분이 또 내게 돌아와 나의 한 시절이 되기를 359

 

 

 

 

 

 

시절과 기분 뒤로 젠더책이 있다

 

모든 문화는 기계적으로 이분화된 성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비대칭적인 젠더 관계위에 존립한다

남녀 성으로 짝지어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신화는

인간을 생산과 소비의 단위로 묶어놓기 위한 허구다

젠더는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걸음걸이마다 행동거지마다 존재하는 것이다

 

1995년 북경여성대회 GO(정부기구)회의에서 성(性)에 대한 영문표기 섹스(Sex) 대신 새로 쓰기로 한 용어 

젠더와 섹스는 우리말로 ‘성’이라는 같은 뜻이지만 원어인 영어로는 미묘한 어감차이가 있다

젠더는 사회적인 의미의 성이고 섹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성을 뜻한다 

남녀차별적인 섹스보다 대등한 남녀간의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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