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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또 다른 세계

웅크린 말들

모공이든 마음이든 뚫려 있는 모든 공허를 탄재가 채웠을때 그는 처음으로 빈틈없이 가득했다 P44

 

흔들리는 것들의 꿈은 흔들리지 않길 꿈꿀 때부터 흔들렸다 P53

 

낯선 땅에서 억제된 언어는 배고픔으로 감지됐다
마음껏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고향의 언어가 익숙한 냄새를 만나면 빈 배를 채우듯 게걸스럽게 발화됐다 P93

 

존재한다고 모두 소유할 수는 없는 그 낱말들 중 자신의 것은 몇 개나 될지 궁금했다 P100

 

고향에서 스르륵 사라진 모래알들이 한 알 두 알 한국으로 흘러와 가리봉에 쌓였다 P101

 

찬란은 빈곤을 묻어 감췄다 P111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지탱하는 경우가 있었다
공기가 생명을 지탱하고, 사랑이 사람을 지탱하며, 부유는 빈곤이 지탱했다 P204

 

중력은 그리움이었다
우주를 떠돌던 천체 하나가 불타 죽었다
고향을 떠난 외로운 혜성은 암혹 저편에서 손짓하는 태양의 인도를 따라 날았다 그리운 불덩이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비행했을 때 혜성은 비로소 알았다
그리움은 잡아당긴다
그리움에 몸을 맡 혜성은 무섭게 잡아당기는 고온의 중력에 부서져 소멸했다.
그는 중력이 그리웠다. 흐르는 것들은 결국 마찬가지라고 체념한 적도 었다.
안온하고 평온한 흐름엔 끼지 못해도 불안하고 둔탁하게 흐르면 그뿐이라고 위안했었다.
흐를 수 없는 곳까지 흘러갔을 때 그는 비로소 알았다.
흐르고 떠다니다 불타 버리는 것이 운명이라면, 흐르고 떠다녔던 그리움의 거리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도 중력이 필요했다. 부서지도록 자신을 잡아당길 보이지 않는 불덩이가 그리웠다 P206

 

정처 없는 삶들이 흘러 고일 수 있는 마지막 정처가 영동에 있었다.
그것은 무한의 우주에서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그들을 잡아당긴 중력이었다.
영동의 애기통(쓰레기통)을 캐며 흘러 다니던 그들이, 허망 위에 열망을 섞고, 절망 위에 희망을 비비며,
하루를 정거하는 그리움의 교각이었다 P209

 

편한 가로를 거부하고 벅찬 세로로 버티느라 힘겨웠을 물고기가 힘을 빼고
뒤집어졌을 때의 편안함이 나는 부럽다. P220 

 

이력서의 여백 앞에서 내가 살아온 시간 전체가 하얗게 지위질 때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됐다. 야윈 이력서를 쓰고 찢을 때마다 살찐 이력서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자꾸 마른 빼가 돼갔다.
세상은 내게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P223

 

너와 나는 고독사 이전에 고독생을 살았다. 살았을 때 이미 몸의 살이 모두 뜯기고 마음의 살이 모두
발라진 백골이었다. 삶은 오르지 산 자의 몫이었고, 죽음도 오로지 죽은 자의 몫이었다.
나와 너 우리에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과,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임종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너와 나 가운데 당신은 없는가.
여기는 백골 세상이다 P226

 

권력 없는 자의 언어 전략은 언어 권력 앞에서 대개 무력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언어 권력의 정치였다. 소수의 사랑을 제거한 표준국어대사전은 그들의 존재도 다수의 언어 속에서 지워 냈다P311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산 위에서 핏방울처럼 붉은 빛이 희뿌연 달빛에 뿌려졌다 P347

 

올챙이가 올록올록하고 우렁이가 우렁우렁했다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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