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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눈물.희망1g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서쪽 벽돌 담벼락 가까이 정해준 자리에 나는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북적하고 어수선한 시장에서 팔려 어두운 상자에 며칠을 갇혀 있다가 열려 나와 보니 어느 시골 마을의 조용한 곳이었다 언덕길 위에 자리한 회색집과 현무암 판석바닥 시원하게 뚫린 동북쪽 멀리 바위산이 있었다 늦은 오후 뜨거울 때도 남쪽 화단은 키 큰 나무들로 짙은 그늘이 져 시원했다 마당을 지나 북쪽 담에 기대면 들판을 지나 작은 산 언덕길 사이로 옆동네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이 굽어져 보였다 그녀는 나를 골똘히 쳐다보며 고심을 하더니 그 자리에 앉혔고 며칠 동안 갈증난 나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감나무 앞 동백나무 옆 자리였다 오래도록 길게 자리해 넓게 차지한 동백은 추운 겨울에도 거뜬했으며 푸르렀고 윤기가 돌았고 튼튼했다 햇살이 하얗게 쏟아지는 남쪽 그곳 화단에 으뜸이였다 그 옆 감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무 껍질이 힘없이 부서지고 떨어져 수피 아래가 군데군데 드러났고 열매도 부실하여 보잘것 없었다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기가 꺾여 일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지냈다 나의 작은 뿌리다리를 슬며시 뻗으면 동백과 감은 건드리는 걸 아주 싫어해 짜증 어린 반항을 했다 특히 감은 껍질처럼 뿌리다리도 아픈 듯 투덜거림이 심했다 그 일년은 정말 힘들었다

나는 조금씩 몸을 움직여 위로는 이미 자라 자리를 차지한 거대한 두 나무지기들을 피해 영원한 생명줄 태양 어머니를 향해 자리를 잡았다 아래의 내 다리들도 서쪽의 꽉찬 자리를 피해 빈틈을 찾아 조금씩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다보니 예기치않게 비스듬한 각도로 자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기울어진 각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사실 그녀는 나를 잊어버린 듯 했다 나처럼 팔려온 적지 않은 어린 나무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녀는 어린 친구들의 자리정함으로 나름 고심하고 있는듯 분주했다 나는 자리가 정해지자 천천히 뻗어자랐다 가끔 그녀가 주는 달디 단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었다 자주 주지는 않았다 몇차례 영양을 준 후 그녀는 나를 아주 잊어버린 듯 내 곁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나도 나름 바쁘게 생활했다 처음 두 거대한 옆지기 동백과 감의 등살에 힘들었지만 새로운 팔가지도 자라 도톰해져 갔고 내 다리도 동백과 감을 피해 빈 자리를 찾아 잘 뻗어 자랐다

어느 하루 그녀가 내 옆으로 왔다 아니 나를 보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아픈 감을 보러 온 것이다 동쪽의 많이 아픈 대추나무를 떠나 보내고 그녀는 마음이 안 좋은 듯 했다 아픈 감을 보더니 새로운 약을 놓아주고 갔다 5년 전 여기 살았던 할머니가 떠나 가신 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고 동백이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내 아래의 동쪽 방향으로 사철나무 무리들이 자리했다 한 20명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시끄러웠다 하던 이야기를 또 말하고 또 말해 귀가 따가웠고 예전의 나처럼 슬며시 다리를 뻗어 신경이 좀 쓰였다 그 시끄러운 사철 앞으로 요상하게 생긴 화살나무가 왔다 화살촉 같은 손가지 생김새에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 뒤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늦은 가을날 이상한 가지모양인 걔네들이 어여쁜 빨간 옷을 갈아입어 깜짝 놀랐다 황홀하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참 예뻤다 이른 봄날 화살처럼 화사하게 빨간 명자도 앙상한 가시 손가지를 슬며시 내 어깨가지에 얹고서 톡톡거리며 재네들 예쁘네하고 한마디 했다

그 해 가을 어느날은 그녀가 내 옆 조금 떨어진 곳에 움직이지 않는 어린 강아지를 묻고 펑펑 울었다 돌을 쌓고 그 앞에 앉아 한참을 펑펑 울고 갔다 가을이란 이름의 유기견 강아지로 겨울을 노숙하다가 병을 얻은 후 그녀에게로 와 짧은 날을 보내고 떠나갔다 그녀는 추운 겨울날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봄 그녀가 다시 활기를 찾은 듯 돌아와 바삐 움직였다 잘 자라고 있는지 쓰다듬고 안부를 물었다 오랫만에 만난 그녀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귓가에 손가지를 뻗어 있는 힘껏 흔들어 표현했는데 들었겠지

그녀가 보살핀 덕분이었을가 감은 활력을 되찾았고 모양은 예쁘지 않았지만 맛있는 단감이 열렸다 가을이가 떠나 간 뒤로 겨울이란 강아지가 오고 봄이란 강아지가 왔다 봄이란 강아지는 먹심이 대단했다 내 앞을 수시로 지나 떨어진 감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하나 먹고 꼭 하나 저장해놓는 뽀미(봄이)란 말괄량이 강아지로 인해 그녀는 웃음이 머물러 즐거워보여 다행이다 내가 이 곳에 온지 5년이 흘렀다 아주 어려서 온 후 그동안 나도 많이 컸다 올 봄에는 하얀 꽃을 그녀에게 드디어 보여주었고 작은 열매도 몇 개 주었다 그녀는 신기한지 한참을 쓰다듬었다 내 몸은 올 해 뜨거웠던 여름 덕에 간지럽게 더욱 커진 듯하다 내년에는 그녀에게 봄날 화사한 하얀 꽃을 더욱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여름에는 청포도같은 부드러운 연두색의 단단한 열매도 줄 수 있을 듯 몸이 커져간다 나는 매화라는 이름의 나무이고 그녀가 지어준 이름은 부드러운 하얀연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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